걱정들

벌써 16주가 다 되었다니 믿겨지지가 않는다. 정말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지난 16주를 어떻게보냈나 다이어리를 뒤적이며 갈무리를 해본다. 수첩이 지저분한 걸 보니,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지냈던 시간들이었음에 틀림없다. 작년 12월,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직장을 그만두고 필리핀 유학을 결정했다. 준비하는 과정 중에 얼마나 많은 걱정거리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유학생들이라면 모두 이 심정에 공감할 것이다. 그 때 가졌던 걱정거리들을 하나씩 나열해볼까한다.

1. 기후 : 적도 근처라서 찜통 더위, 숨쉬기도 힘들다?
생각보다 덥지 않다. 습도가 높은 편이라고 해도 바람이 잘 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또 늘 실내에서 지내기 때문에 더위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학생은 없었다.

2. 공기 : 매연 심하다?
지프니, 트라이시클 등 현지 사람들의 주요 교통 수단의 경우, 매연제거 장치가 없어 매연을 뿜고 다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내 주요 도로나 차량이 많이 정차되어있는 곳에 가면 매연냄새를 맡게 된다. 하지만 그 밖의 곳에서는 문제없다. 또 기숙사 건물 역시 외곽에 있기 때문에 매연과는 상관없는 환경이다.

3. 음식 : 느끼하다?
인터넷 서핑을 할 때 많은 학생들이 다소 기름지고 짠 식단 때문에 힘들다고 평가해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실제로 와보니 별로 그렇지도 않다. 이 곳 음식은 한식에 가깝다. 매끼 과일이 제공되며 음식도 맛있는 편이다.

4. 볼거리/즐길 거리 : 놀게 되느라 공부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거절을 잘 못하는 내 성격상 그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게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다바오에서 살아보니 이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학원이 외곽에 떨어져 있는데다 평일 외출이 금지되어있어 평일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다. 또 다바오는 유흥시설이 발달하지 못하도록 시장이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도시다. 예를 들어, 술집이더라도 새벽 2시 이후엔 술을 팔지 못하게 되어있고 담배도 지정된 장소 외에서 피우게 될 경우 엄청난 과태료가 부과된다. 클럽은 두 개 정도? 이마저도 학생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놀 분위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에 비해 커피숍은 꽤 많다. 주말에 머리 식히고 싶을 땐 늘 커피숍을 이용했다. 펄팜리조트, 탈리굿 아일랜드, 사말 아일랜드 등 가까운 거리에 아름다운 섬들도 많아 현지인, 외국인 여행객들이 많다. 다바오는 정말 건전하고 즐겁게 스트레스를 풀면서 공부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다.

5. 기숙사 시설 : 공동샤워실, 공동화장실 불편하다?
시애틀어학원을 결정할 때에 가장 걸렸던 게 다름아닌 공동샤워실, 공동화장실 문제였다. 사실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배설(?) 문제를 자유롭게 해결하지 못해서 변비라도 걸리면 어쩌나 고민이 됐다. 하지만, 실제로 생활해보니 쉽게 적응이 된다. 깔끔하고 예쁜 대학생 여자아이들 모두 잘 지내고 있다. ^^

6. 발음 : 필리핀 식 발음?
필리핀에 오래 살지 않는 이상, 필리핀 식 발음을 익히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 작년, 한국에 있는 동안 필리핀 선생님과 친하게 지내며 여러 차례 화상채팅으로 만나 영어를 배웠다. 이 분이 스페인 혼혈계라 억양이 몹시 딱딱했는데도, 내 발음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틔우고, 영어 기초를 닦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필리핀 현지 선생님들의 발음을 문제 삼는 것은 너무 앞선 걱정이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시애틀 어학원 선생님들의 발음은 백인 스타일에 가깝다. 학원에서 교사를 채용할 때 발음 부분을 중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재미있는 것은 이 분들 발음이 상대적으로 너무 좋아서 필리피노들 사이에서도 주목받는다는 점이다. 마치 시골에서 사는 아이가 사투리를 안 쓰고 표준어를 쓸 때 친구들 사이에서 느끼는 거리감이랄까.

7. 교회
다른 사람들에겐 중요한 요소가 아니겠지만, 내게는 주일에 예배드릴 교회가 있는지 여부가 중요했다. 다바오에는 몇 군데 한인 교회(사이비나 이단이 아닌, 총신교단, 감리교단)가 있어 주일에 예배드릴 수 있었다. 또 필리핀 현지인 교회(Batism)에 다닐 기회도 있었는데, 설교말씀이 참 분명하고 명쾌했다. 친절하신 선생님과 함께 출석하게 되어 매 주일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깊이 나눌 수 있어 좋은 시간들이었다.

내 영어 이야기

재작년 초 나의 영어 능력에 대해 목표를 잡을 때만해도 ‘말하기/듣기/쓰기/읽기 4가지 영역에서 초등학생 수준은 넘어보자’라고 생각했다. 회화학원에서 꿀 먹은 벙어리 신세는 면하자는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러다가 작년엔 우연찮게 알게 된 필리핀 선생님과 가끔 화상채팅으로 1시간씩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점점 쉽고 짤막한 영어소설들도 읽으면서 영어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목표를 잡을 때 4가지 영역 운운했지만, 사실 내가 정말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4개월 전 이 곳에서 레벨테스트를 받을 때 꽤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받은 레벨은 말4, 듣3, 읽4, 쓰3이었다. (총 6레벨로 구성되어있고, 가장 높은 레벨은 6레벨이다.) 이 정도면 4달 후에 6레벨까지 모두 마치겠다 생각하고 진행하다보니, 2달 후 ESL 과정 중에 내 자신이 정체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3달 째부터 순전히 나 자신을 자극하기 위해 토플 과정을 신청했다. 레벨테스트 대신 토플모의고사를 치러야 하는데, 70점을 받아 무난히 토플 과정에 진입할 수 있었다. 5주 후 6월 12일에 실전 토플을 치른 후, 지금은 귀국을 앞둔 상태이다.(결과는 한국에서 확인) 그 때 내 수준과 지금을 주관적으로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말하기 : (처음)의사 표현은 가능함. 그러나 제한된 표현, 문법적인 오류 엄청남.
(8주차) 어휘량이 제법 늘었다. 표현이 훨씬 다양해졌고 영어식 표현으로 개선되어감을 느낀다. 문법이 잡히면서 사용하는 문장과 시제 표현이 다듬어진다.
(16주차) 모든 수업 중에 토플 스피킹 수업이 주는 긴장감은 그야말로 최강이다. 스피킹 선생님께서 시크한 표정으로 내뱉는 한 마디(not good 혹은 not bad)로 내 오후 시간의 기분이 좌우되곤 했다. 45초에서 1분 내의 제한시간이 주는 긴장감을 넘어서기 위해서, 무지막지하게 질문들을 진행해가며 나를 밀어붙이셨다. 마지막 주에는 노트 테이킹할 필요도 없이, 꾸물대지 않고 아무 질문에나 척척 내 의견을 정리해서 말해내는 발상을 훈련한다. 이젠 관계대명사, 수동태를 사용하여 문장을 길게 짧게 만들거나 변형하기까지 한다. 참, 스피킹의 경우엔, 수업 시간 외에도 거의 매일 저녁, 자습시간에 30분씩 할애하여 토플 학생들을 위한 스피킹 수업이 제공된다.

2. 듣기 : (처음)팝송 중 몇 단어가 들리면 기뻐했다. 여전히 All by myself가 ‘오빠만세’로 들린다.
(8주차) 아는 단어들, 전체적인 분위기, 그리고 배경지식을 활용해서 전체 내용을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모르는 토픽에 대해서는 완전 헛다리 짚는 식으로 이해하곤 했다. 그럼에도 구(Phrase) 단위로 문장이 들리기 시작한다. 쇼핑하고 식사 주문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16주차) 본격적으로 토플 과정을 지나면서 가장 많이 개선된 부분이다. 이제 문장 대부분이 손에 잡힌다. 어휘량이 부족한 게 한계이지만 꽤 자신감을 갖게 됐다. 어려운 토픽과 다양한 억양의 강사들이 진행하는 강의들을 들으면서 내용을 추론,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3. 쓰기 : (처음)문법적인 오류나 외국인이 이해할 수 없는 표현 많았다. 그 때의 문장들을 지금 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8, 16주차) 토플 때보다 ESL과정을 착실히 밟은 데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2달간 꼬박꼬박 작문 선생님과 좋은 표현에 대해 토의하고 첨삭을 받으면서 한국식 사고와 영어식 사고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지금도 입에 붙은 질문이 ‘What does it mean?’, ‘What is the difference between them?’이다. ^^ 작문 시간 외에도 거의 매 수업시간 작문과 연관된 과정을 보내야했고 모두 첨삭받는 과정을 거치니 엄청난 훈련이 될 수밖에 없다. 또, 관사나 전치사, 목적어 누락, 단수/복수를 잘 못 기재하는 실수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4. 읽기 : (처음)모르는 어휘에 집착하느라 신문기사 전체를 읽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음;;
(8주차) ESL 통해서 다양한 토픽들을 접하면서 관련 분야의 어휘와 전체 구조, 자주 사용되는 표현들을 익히는 훈련을 했다. 8주차까지 받은 훈련 정도로도 토플 모의고사에서 21점 정도는 받을 수 있다.
(16주차) 이젠 왠만한 원서를 읽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토플 어휘가 상당히 고급스럽고 문장도 엄청나게 길지만; 단 시간에 내용을 스킵해가면서 읽고 있는 내 모습이 대견스럽다. 토플과정에서는 아카데믹 렉쳐 수업을 듣게 되는데, 대표적인 토플 주제들에 대해 가로, 세로로 지식들을 엮어나가는 과정이 꽤 흥미롭다(그것도 현지인 선생님의 영어강의로!). 배경지식을 확 넓혀주는 시간이었다.

쑥스럽지만 2년전, 1년전, 그리고 4개월 전의 내 모습을 돌아보면, 지금 내 모습은 과거의 나 자신에겐 도달할 수 없었던 꿈과 같은 상태이다. 내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충실하게 빡빡한 일정들을 소화해냈다는 게 스스로 대견스럽고, 앞으로도 더 잘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어 정말 행복하다.

당부

유학생 모두에게 당부하는 것은, 자기주도적인 학습 자세를 먼저 갖추라는 점이다. 먼저 여기에 온 목적과 목표를 분명히 해두고 모든 생각들을 이 목적과 목표에 포커스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시스템, 사람)에 의존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다 되겠지 하는 자세는 슬럼프나 자괴감, 실패로 이어지게 만든다.

왜, 무엇을 위해서 영어를 공부하려고 하는지, 어느 수준으로 향상시키고 싶은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두고 수첩에 적어두고 자꾸 상기시켜보자. 정신적으로 배가 고파지는 효과가 있다. 물론 애초 계획했던 만큼 다 완성될 순 없겠지만 이게 추동력이 되어주어 슬럼프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을 예방해준다.

목적 목표 외에도, 유학생활 중 페이스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팁을 덧붙이며 16주간의 유학일지를 마친다.

* 복습 / 실수 체크 - ESL 과정 중 모든 writing 결과물을 모아서 체크표를 만들었다. 관사, 전치사, 동사단수복수, 시제 등등 내 경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문제가 다른 모든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내 문제점을 문법 선생님과 공유하면서 별도의 보조자료 등을 받아서 약점 부분을 고칠 수 있었다. (단, ESL 학생들에게만 권장)

* 시간 활용 : 학생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은 수업 중간 쉬는 시간과 break time, 저녁 자습시간과 주말이다. 주중엔 복습과 숙제, 주말엔 예습을 해두면 수업 진도를 빨리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첩을 꼭 활용하길 바란다. 우선순위대로 할 일들을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 지출 기록부 작성 : 매일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다보면 스트레스가 쌓이게 마련이다. 다바오 물가가 다소 싼 편이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쇼핑도 즐기다보면 순식간에 지갑이 헐렁해지곤 한다. 내 경우엔, 한 달 목표 용돈(15만원)을 정해두고 매주 지출기록부를 작성해서 얼마나 썼는지 확인해가면서 적당하게 소비할 수 있었다. 유학 초기에는 외출이나 여행을 줄이고 공부에 집중했고, 유학 마지막 달에 펄팜데이투어 등 큰 돈을 사용했다.